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장년층은 디지털기기를 잘 다루지 못한다는 편견이 컸습니다. 대중매체에서도 중장년층은 휴대전화나 컴퓨터 사용 방법을 몰라 젊은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그려지곤 했는데요. 디지털기기의 작동법을 알려달라는 부모님과, 귀찮아 하는 자식들의 모습이 연출되는 장면을 자주 보셨을 겁니다. 이러한 콘텐츠의 교훈은 '부모님이 작동법을 습득하는 속도가 느려도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알려드리는 것이 효도'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요즘에는 얘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고, 유튜브·OTT 서비스를 이용할 뿐만 아니라 직접 크리에이터로 나서는 중장년층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요. 젊은 층 못지않게 디지털기기와 인터넷을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실버 서퍼(Silver Surfer)'들이 등장한 것인데요. 조용한 저력을 자랑하며 시장의 판도를 흔들고 있는 실버 서퍼들은 어떻게 IT산업의 새로운 핵심 소비층이 되었을까요? 실버 서퍼를 집중 분석해보았습니다.
MZ세대만큼 막강한 실버 서퍼가 온다!
실버 서퍼는 인터넷 사용자를 이르는 말인 '웹서퍼(Web Surfer)'에 노년을 뜻하는 '실버(Silver)'를 접목한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웹서핑을 자유자재로 즐기고, 온라인으로 재화나 서비스를 활발하게 구매하는 노년을 의미해요. 웹버족(web+silver), 실버티즌(silver+netizen), 디지털 실버족(digital silver族)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과거의 실버 세대들은 허리가 안 좋거나 눈이 침침해 PC를 오래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PC 앞에 앉지 않아도 태블릿PC나 스마트폰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손가락으로 쉽게 디지털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오자 이들은 더욱 쉽게 인터넷을 접하게 되었어요. 실제로도 지난 5년간 3~9세의 유아와 60대 이상 고령층의 인터넷 이용률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하니, 디지털기기를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연령층이 그만큼 폭 넓어졌다는 게 실감이 나시죠? 특히 70대 이상 연령층에서도 2명 중 1명 정도가 스마트폰 등을 통해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합니다.
실버 서퍼가 뜨는 이유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오프라인 소비를 예전만큼 활발하게 할 수 없게 되면서부터 실버 서퍼들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금융거래는 은행에 찾아가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장년층들의 인식이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죠.
실버 서퍼는 2010년대 중후반부터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실버 서퍼의 등장을 주도한 주 연령층은 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였는데요. 그들은 고도성장기에 사회에 진출해 안정적으로 부를 쌓고, 자신에 대한 투자에 적극적인 세대였습니다. 또한 디지털기기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죠. 이처럼 탄탄한 경제력을 지닌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한 뒤 디지털기기 사용에 많은 시간을 쏟게 되면서 실버 서퍼가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버 서퍼들은 어떤 제품을 주로 구매할까요? 건강식품이나 안마의자 등 건강을 위한 제품들이 주로 소비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실버 서퍼는 트렌드에 관심을 갖고 자신에게 추가할 가치가 있는 제품들을 찾아 주체적으로 소비합니다. 패션·잡화, 식품, 생활용품, 대형가전 등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는 폭넓은 분야의 쇼핑몰에서 실버 서퍼들의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요.
실제로 최근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2021년 60대 이상 연령층에서 온라인업종의 승인 건수가 2019년 대비 142%나 급증했다고 합니다. 수치로도 고령층의 구매력이 입증된 셈입니다. 또한 노인실태조사 결과 노인의 개인소득은 늘어난 반면 가족의 보조와 같은 사적이전소득은 줄었다고 하는데요. 오는 2026년에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접어들 것으로 예상되기에, 실버 서퍼의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질 전망입니다.
* 고령사회 : 만 65세 이상 고령인구의 비율이 14%를 넘긴 사회
* 초고령사회 : 만 65세 이상 고령인구의 비율이 20%를 넘긴 사회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실버 서퍼들은 온라인 콘텐츠 시장에도 발을 들였습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물건을 구입하는 것은 물론, 온라인 콘텐츠를 보는 시간도 늘었어요. OTT 서비스에서는 9%에서 13%로,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는 7%에서 11%로 50대 이상의 이용량 비중이 높아졌다고 하죠. 이미 고령층의 스마트폰 영상 시청 시간이 TV 시청 시간을 추월했다고 하네요.
더 이상 ‘도전’ 이 아니다! 실버 크리에이터들의 반란
실버 서퍼들은 여타 연령층과 다를 바 없이 온라인의 특성을 자유자재로 활용합니다. 그렇기에 젊은이들의 장래희망으로만 여겨졌던 SNS·유튜브 크리에이터로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실버 크리에이터’들 또한 늘고 있어요. 자식 또는 손녀의 영상에 잠깐 출연하고 마는 정도에서 벗어나, 본인의 계정으로 직접 영상을 만들고 게시하는 주체적인 형태로 발전한 것이죠.
대표적으로 1세대 실버 크리에이터로 꼽히는 박막례 할머니는 소탈하고 정겨운 일상을 담아내며 136만 구독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박막례 할머니를 시작으로 패션 유튜버 밀라논나, 이찬재·안경자 부부 등 여러 실버 크리에이터들이 등장하며 뜨거운 인기를 얻었는데요. 최근에는 패션 인플루언서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여용기 할아버지와 최고령 유튜버 김영원 할머니도 주목받고 있죠.
직접 크리에이터가 되고자 하는 노인들이 많아지자, 1인미디어 크리에이터 교육을 개설하는 지자체와 노인대학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한 살 한 살 먹어가는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실버 크리에이터들은 황혼에도 충분히 활기차고 신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름으로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는 실버 세대
최근에는 온라인 서비스를 활발하게 이용하는 '실버 서퍼'에서 나아가, 더 넓은 의미를 담은 '액티브 시니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기도 하는데요. 건강하고 적극적으로 은퇴 후 생활을 즐기는 노년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에서는 영(Young)과 올드(Old)를 합친 ‘욜드(YOLD)세대’라 부르기도 합니다. 비슷한 개념으로 김난도 교수는 ‘오팔(OPAL)세대’라는 키워드를 제시하기도 했어요. Old People with Active Lives의 약어로, 활기찬 삶을 사는 신노년이라는 뜻이죠.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를 대변하는 58년 개띠 세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광고회사 대홍기획에서는 소비력으로서 위력을 보여주는 이 세대들을 ‘WAVY세대’라는 신조어로 정의했어요. Wealthy, Active, Value, Youth의 약어로 경제력과 능동성을 바탕으로 추구해온 가치를 단단히 다지면서도 젊음을 놓지 않는, 그야말로 새로운 물결을 주도하는 세대라는 것이죠. 그레이(grey)와 전성기(renaissance)의 합성어인 ‘그레이네상스’라는 용어도 등장했습니다.
젊고 역동적인 MZ세대를 공략하던 기업들은 점차 실버 서퍼 세대에게로 눈길을 돌려 ‘에이지 프렌들리’ 전략을 내세우고 있어요. 고령자 위주로 전략을 구상하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중장년층이 사용하기 쉽도록 모바일 앱을 시각적으로 전면 개편하는 기업은 물론, 실버스토어 테마관을 따로 운영하는 기업도 있어요. 고령층을 위한 대규모 주거단지를 출시하겠다는 기업의 소식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2012년 대비 2020년 고령친화산업의 시장규모는 약 2.7배가량 성장했습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시장 규모는 더욱 가파른 속도로 늘어나겠죠?
청춘(靑春)의 사전적인 정의는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입니다. 일반적으로 10대 후반에서 20대에 걸치는 시절을 청춘이라고 부르지만,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간다면 언제든 청춘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자유롭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실버 서퍼들의 봄날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요? 청춘을 만끽하는 실버 서퍼들은 앞으로도 늘어날 전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