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윤동주의 시 <봄>의 첫 구절이다. 어느덧 춘삼월, 꽃샘추위는 아직이지만 아침저녁으로 미묘하게 달라진 따뜻한 공기가 우리 혈관 속에 흐른다. 최근 영화 ’동주’의 개봉으로 윤동주 시인이 재조명되고 있다. 봄 향기가 더해진 그의 체취를 따라 인왕산 자락을 걸었다.
봄의 시작,
산책의 시작
1941년 연희전문(현재 연세대) 학생이던 시인 윤동주(1917-1945)는 서촌으로 불리는 종로구 누상동 9번지에 있던 소설가 김송(1909-1988)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당시에는 단독주택이었지만 지금은 연립주택으로 바뀌어 터만 남아있는 그곳엔 누군가 놓아둔 꽃다발이 있었다. 근처에는 꽃집이 많았는데 누구보다 민족의 봄날을 열망했을 윤 시인과 봄꽃 향기는 꼭 어울린다. 윤 시인은 시정을 다듬기 위해 함께 하숙하던 국문학자 정병욱(1922-1982)과 종종 인왕산에 올랐다고 한다. 그의 발걸음을 상상하며 인왕산을 향해 오르막길을 걸었다. 도심 한가운데서 만난 깨끗한 공기가 너무도 반가워 폴짝폴짝 뛰다시피 오르다 보니 순식간에 수성동 계곡에 도착했다.
수성동 계곡,
도심 속의 오아시스
물소리가 유명하여 수성(水聲)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이 계곡은 (현재는 계곡 물을 보기 힘들며, 비 오는 날이나 그 다음 날 계곡의 운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의 그림, 추사 김정희의 시 속에 등장하여 유명하다. 특히 겸재의 산수화에 등장하는 돌다리로 추정되는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조선시대에 와있는 듯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토록 당대 최고의 문인,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수성동 계곡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녹지로 조성되었다. 공원 산책길을 따라 자연스레 끝까지 올라 가보면 인왕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와 북악 스카이웨이가 있는데 스카이웨이를 따라 느린 걸음으로 20여 분이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문학관에 도착한다.
영혼의 가압장
윤동주 문학관
2009년, 종로구는 인왕산 자락을 거닐며 시상을 구상했을 윤동주 시인을 기리기 위해 청운공원에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고 시비(詩碑)를 건립했다. 그 아래에 있던 청운 수도가압장(水道加壓場)과 물탱크 시설을 재건축하여 윤동주 문학관도 만들었다. 윤동주 문학관에는 시인의 친필 원고, 시집, 문학 잡지 등이 전시되고 있다. ’윤동주의 시는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가압장처럼 세상사에 지쳐 비겁해지는 우리 영혼에 아름다운 자극을 준다’ 문학관 입구에 쓰인 글이 관람객을 한참이나 멈춰 서 있게 한다.
봄은 앙상했던 겨울의 여백을 향기와 색으로 꽉꽉 채운다. 봄 같은 마음을 가진 순수한 조선 청년 윤동주. 그의 향기를 따라 걸어온 길, 그 끝에 올려다본 하늘이 어쩐지 한층 더 맑아 보인다.